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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벨벳

사는 게 지치고 텐션은 떨어지는데 그래도 살아가는 건, 아무래도 제 안에 핑크블러드가 흐르고 있어서인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저는 진성 러비는 아니고 ’찍먹’인데, 그런데도 레드벨벳은 신보가 나오면 무조건 한 바퀴는 돌리거든요. 이번엔 오랜만에 분기 컴백으로 돌아왔는데, 데뷔 12주년이고 [The Velvet]이 나온 지가 딱 10년이더라고요. 그런데 돌아온 앨범 제목이 [Velvet Summer]. 저는 제목을 보자마자 이미 넘어가 있었어요. 하필 제일 더울 때, 하필 ’벨벳’을 달고 온 거니까요. 그러니 저부터 물어야겠죠. 왜 ’벨벳’만 붙으면 이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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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은 처음에 ‘레드’ 컨셉과 ‘벨벳’ 컨셉을 나눠서 데뷔했잖아요. 나중엔 그 구분 없이 활동한다고 했지만, 세계관 안에서는 은근히 계속 그 결을 반영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이 벨벳 계열 앨범을 정말 좋아합니다. ‘Be Natural’, ‘Automatic’, 그리고 [The Velvet]의 ‘7월 7일’ — 이건 진짜 슬프고 아름답고, 그 시대를 통째로 담은 노래죠.

한국 케이팝 리패키지 최고를 꼽으라면 꼭 들어가야 하는 Perfect Velvet과 The Perfect Red Velvet도 마찬가지고요. 여기 실린 ’Bad Boy’는 제가 명곡띵곡으로 애정하는 곡이에요. 재밌는 건 레드벨벳에 ‘boy’ 시리즈가 유난히 많다는 거예요. Really Bad Boy, Oh Boy… 그 계보의 끝에 이번 타이틀 ‘Surfin’ Boy’가 있어요. 벨벳에 boy까지 붙었으니, 저는 뭐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거죠.

그런데 제가 왜 매번 벨벳 앞에서 멈추냐면, 이게 그냥 세련되고 고급진 게 아니라 스산하고 엉뚱하고 도회적인 무드가 있어서예요. 밑에는 재즈나 네오소울 화성이 깔려 있고요. 화성학은 제가 아직 공부하는 중이라 조심스럽게 말하는 건데, 이 질감이 자꾸 90년대에서 2000년대, 지금은 못 쓰는 단어지만 ’어반’이라고 묶였던 그 네이스티하고 멜랑콜리한 알앤비를 떠올리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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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예전엔 저 혼자만의 상상이었어요. 자넷 잭슨 [The Velvet Rope]에서 온 거 아닐까, 혼자 즐거워하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레드벨벳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쭉 놓고 보니, 상상이 아니더라고요. 이 팀이 그동안 함께해온 프로듀서들이 다 그 계보에 있어요. 크게 두 갈래인데, 하나는 뉴잭스윙을 만든 테디 라일리, 그 밑에서 나온 넵튠스 라인이에요. 다른 하나는 프린스에서 잼 앤 루이스, 자넷의 ’Control’로 이어지는 미니애폴리스 사운드고요. 이 두 물줄기가 만나서 그 ’어반’이 된 거예요.

예를 들면 오비 클라인 같은 사람이요. 소울쇼크 앤 칼린 계보에서 내려온 프로듀서인데, 이센스 작업으로도 알려져 있죠. 채드 휴고, 스테레오타입스, 진보, 수민, 디즈까지. 레드벨벳이 걸어온 길에는 이런 손들이 계속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벨벳이 스산하고 도회적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죠. 회사 기획이긴 하지만, 이 계보가 사운드 안에 실제로 흐르고 있는 거예요.

앨범 자체는 기대 이상이에요. 막 자극적이고 후킹한 걸 기대하면 심심할 수 있는데, 그게 벨벳이에요. 레드 썸머 때가 ’빨간 맛’처럼 트로피컬하우스로 뻥 터뜨린 여름이었다면, 이번 ‘Surfin’ Boy’는 텐션을 확 낮췄어요. 더 성숙하고, 그때를 아련하게 추억하는 여름인 거죠. 함께 익어가는 여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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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즘 SM이 이상하게 보사노바·삼바에 꽂혀 있어요. 조이 앨범도 그렇고 하투하 때도 그랬는데 여기서도 하더라고요. 근데 이게 우연이 아닌 게, 80년대부터 00년대 가요에 원래 보사가 잔뜩 들어 있었고, 그걸 듣고 자란 세대가 지금 제작진이 됐거든요. 거기에 브라질 펑크가 틱톡으로 퍼지고 라틴팝이 세계적으로 뜨는 흐름까지 겹친 거예요. 케이팝 여름이 트로피컬하우스를 졸업하고 ’성숙한 여름’을 찾으니까, 그 답이 보사였던 거죠.

두 번째 곡 ’Hot Girls Cool Vibe’는 켄지 작사·작곡의 믹스팝이에요. 저는 믹스팝도 ’말이 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거든요. 다른 문화권을 이어붙이는 게 케이팝만의 상상력인 건 맞는데 — 하투하 ’아이코닉 하트’가 저지클럽에 전대물 비주얼을 붙인 것처럼요 — 저는 그게 납득이 돼야 좋아요. 이 곡은 캘빈 해리스 같은 디스코 사운드에서 차 부릉 하면서 힙합으로 넘어가는데, 스산하긴 해도 둘이 완전 동떨어진 게 아니라 납득이 되더라고요. 완전 제 취향은 아닌데 그래도 좋았어요.

제 최애는 뒤에 있는 ’Orchestra’예요. 벨벳 특유의 스산함에, 리듬은 아프로비츠에서 쓰는 트레시요를 깔았어요. 크리스 브라운이랑 위즈키드의 ’Call Me Every Day’가 생각나는 그 리듬이요. 그런데 진짜 재밌는 건 작사예요. 황현 작사가가 작곡 전공을 살려서 클래식 용어들로 가사를 쭉 나열해요.

이게 ’덤덤’에서 마이클 잭슨 곡 제목들을 나열했던 거랑 똑같은 ’나열의 미학’이에요. 게다가 황현 작사가가 나온 작곡과가 유재하부터 김형석, 신재홍, 심상원, 정재형까지 기라성 같은 분들이 나온 그 라인이라, 맥락까지 이어져서 좋고요. 그 위로는 세이렌 같은 코러스가 양옆에서 홀리듯 와요. 섬뜩하고 프리키하죠. 그래서 최애가 ’Orchestra’예요.

뒤로 가면 ’훌라후프’는 멤버들 화음이 좋은 곡이에요. 제목 때문에 자꾸 효녀가수 현숙 님이 떠올라서 이상한 리믹스가 머릿속에 도는데, 그건 참겠습니다. 끝 곡 ’하와이’는 조이가 작사를 했는데, 진행도 내용도 옛날 투니버스 주제가 같은 느낌이에요. 박혜경 님이 부른 ‘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엔딩곡 같은. 마침 조이가 박혜경 ’안녕’을 리메이크로 부른 적도 있고, 예쁜 노랫말이 있는 가요를 많이 커버해온 분이라, 작사가로서도 그런 고운 노랫말이 나오더라고요.

근데 제가 이 앨범을 자꾸 다시 트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이 앨범, 파도소리로 시작해서 파도소리로 끝나요. 그래서 끝까지 듣고 나면 끝이 다시 처음으로 물려서, 계속 틀면 영원히 반복되거든요. 그 수미상관을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여름 레드벨벳은 안 끝나겠구나. 이 앨범만 있으면 이 여름은 계속 여기 머물러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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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벨벳이 좋은 걸 혼자 상상하면서 즐거워했는데, 이번엔 그 걸어온 길이 증명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요. 여름은 레드벨벳이고, 벨벳은 언제나 이깁니다.